
2026년 2월 4일,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영원홀에서 『한국대중문화사』(김창남) 영문판 출간 기념 세미나 “한국학 연구와 번역”이 개최되었다. 이번 행사는 한국 대중문화 연구의 권위자인 김창남 교수의 저서가 영문으로 소개된 것을 기념하고, 글로벌 환경 속에서 한국학 지식의 재맥락화와 번역의 역할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행사의 문을 연 김창남 명예교수(성공회대)는 저자 강연을 통해 『한국대중문화사』의 집필 동기와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적 궤적을 설명하였다. 김 교수는 이 책이 거창한 학문적 성취욕보다는 어린 시절부터 즐겨온 영화, 만화, 노래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과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대중문화가 사회의 정치·경제적 상황과 밀접하게 맞물려 변화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현재 케이팝과 한류가 거두고 있는 글로벌한 성공의 근본적인 동력은 한국 근현대사가 이룩한 민주화에 있다고 분석하였다. 검열 권력이 약화되고 대중의 자기표현 욕구가 분출될 수 있었던 민주적 토양이 있었기에 오늘날과 같은 창의적인 콘텐츠 생산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어진 세션에서 서지영 교수(서울대)는 “번역/출판 경과 보고 및 한국학 연구로서의 번역”을 주제로 구체적인 사업 진행 내력을 발표하였다.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한류연구센터는 한국학진흥사업의 일환인 ‘한국학술번역사업’에 선정되어 2022년 11월부터 2026년 6월까지 "한국대중문화 총서 시리즈"의 영어 번역을 수행하고 있다. 그 첫 번째 결과물로 2025년 10월 Brill 출판사에서 발간된 『한국대중문화사』의 출판 과정을 소개하며, 저자·연구진·원어민 감수·출판사 에디팅 팀으로 이어지는 체계적인 분담 체계를 설명하였다. 또한, 이번 번역이 단순한 언어 전환을 넘어 대중문화로 읽는 한국 근현대사의 표본을 제시하는 학술적 의의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한울 교수(서강대)는 “AI 시대의 번역과 한국학의 향방”을 주제로 번역 패러다임의 변화를 짚었다. 한 교수는 과거 팬 번역이 정서적 중개자 역할을 했던 단계를 지나, 기계 번역(MT)의 표준화 시기를 거쳐, 현재 생성형 AI 시대에 이르렀다고 진단하였다. 특히 AI 번역은 학습된 규범을 바탕으로 맥락을 내재화하지만, 이는 설명되지 않은 중간값의 표준화를 낳을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을 번역하는가’를 넘어 ‘어떤 한국이 AI에 의해 재현되는가’의 문제로 이동하며, 팬 전문성과 학술적 지식을 결합한 연구자의 ‘인간적 에이전시(agency)’가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마지막 순서인 라운드 테이블에서는 한국학 및 대중문화 교육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가 공유되었다. 이규탁 교수(한국 조지메이슨대)와 조영한 교수(한국외대)는 해외 대학 현장에서 한국학 관련 영어 텍스트가 여전히 부족함을 지적하며, 양질의 국문 저작들이 활발히 번역되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박소정 교수(한양대)는 ‘정(情)’이나 ‘흥(興)’ 같은 단편적인 개념으로 한국을 설명하는 시대착오적 담론을 경계하며 지식 업데이트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이하나 교수(서울대)는 학문 제도 내부의 차이를 고려하여 외국인 독자를 겨냥한 전략적인 집필과 번역이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언급하였다.
플로어 토론에서도 한류 현상을 넘어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 전반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의 확충, 용어의 표준화, 그리고 아카이빙의 확장성에 대한 열띤 논의가 이어졌다. 이번 세미나는 한국 대중문화 연구가 번역이라는 매개를 통해 어떻게 세계적인 보편성을 획득하고, 미래 한국학의 지평을 넓혀갈 수 있을지 확인하는 뜻깊은 자리가 되었다.